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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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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Entries posted by 하양

  1. 슬픈 일은 딱히 없었지만, 있었다고 한들 그 누구도 몰랐을 거다. 세월살이는 감정을 절제하고 그 발효시점을 지연하는 방법을 사람이 터득하도록 훈련시킨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10의 슬픔을 5로 절제하고, 5를 1로 절제하는 법을 배웠다.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크기가 점점 더 커진다는 뜻이다. 오늘 슬픈 일은 없었다만, 그러나 이건 퍽 슬픈 사실이다.
    대학생 때, 항상 싱글벙글 잘 웃던 친구가 있었다. (엄연히 따지면 누나지만… 본인이 빠른 년생이라며 친구하자고 했다.) 반면에 난 항상 심각하고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친구를 보면서 ‘항상 뭐 저리 실 없이 웃고 다닐까, 걱정도 없고 거참 상팔자다’라고 은근히 생각하던 속내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짐짓 얕보는 마음이었다.
    학기를 보내면서 서로 친해지고 난 뒤의 일이다. 종종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였고, 그날도 별 다른 일 없이 저녁에 잠깐 술을 먹자고 한 뒤에 그 친구를 비롯해 3명이 술집에 모였다.
    나는 그 날 유독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있었다. 아니, 줄곧 목적 없이 살고 있는 저 자신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세상은 암만 봐도 내 편이 아닌 것 같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은 깃대에 매달려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고 있었다.
    그저 바람이 조금 불던 날이었을 뿐이다. 나는 친구에게 성토하듯 내 신세를 한탄하며 내가 겪는 불행의 크기를 쇼케이스하듯 떠벌렸다.
    술을 마시면서 계속 나를 위로해주던 그 친구로부터, 그 날 난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가정의 불화로 부모님이 이혼한 것,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면서 넉넉치 못한 형편 덕에 많은 고생을 한 것,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서 이미 학생일 때부터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에 뛰어든 것. 그렇게 원하던 대학에 오기까지의 이야기.
    내가 그 순간 스스로에게 느낀 모멸감은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거대한 것이었다. 거센 바람이 뇌 안에서 메아리치는 것 마냥 끊임 없이 비난을 던져 댔다. 그 비난의 아픔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다. 날 위로 하던 나의 불쌍한 내 친구에게 나는 무슨 말이나 위로를 했던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어찌저찌 자리를 마무리하고 집에 와서는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실존하는 내 어리석음의 크기를 직접 목도한 충격은 아무래도 당시의 낮은 정신력으로는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길고 또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여러 해가 흘렀다. 서로의 소식이 닿지 않은지도 10년이 넘었을 무렵이고, 그 불에 데인 듯 아팠던 기억은 아주 까마득히 잊혀진 거 같았다. 그 무렵 나는 호주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다. 호주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힘들어서 향수에 젖는 날이면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찾아서 읽었다. 소설가 ‘박완서’의 책을 보았던 날이다. 그리고 한 문장에서 숨이 멎어버렸다.
    그 날 일말의 저항도 없이 터져버린 눈물은,
    그 때의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나서였을까.
    아니면 나 또한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는 감격의 눈물이었을까.
  2. 260331 상냥함에 관한 이야기

    세상에는 지나간 뒤에야 더 분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그가 있던 자리는 소란하지 않았는데, 돌아서고 나면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누그러져 있다.
    사람들 사이에 얹혀 있던 마른 기색이 걷히고, 말들은 제자리를 덜 다투며 흘러간다.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은 남을 대할 때 말끝에 힘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런 장면 앞에서 오래 머문다.
    상냥함은 대개 그렇게 드러난다.
    지나간 자리에 은은한 향기처럼 남는다.
    사람들은 밝은 것을 먼저 본다.
    많이 아는 사람의 말은 번쩍이고, 많이 가진 사람의 생활은 눈에 띈다.
    지식은 사람을 높은 데로 데려가고, 재물은 사람의 앞에 길을 낸다.
    그것들은 살아가는 데 쓸모가 크다.
    그러나 쓸모가 곧 품위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세상에서 그 반대의 경우를 자주 본다.
    말은 유려한데 그 말끝이 늘 남의 살을 긁는 사람이 있고, 손에는 넉넉한 것이 들려 있는데 좀처럼 누구도 따뜻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많이 가졌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사람의 높이는 가진 것의 높이와 같지 않다.
    높이는 오히려 그것을 다루는 데서 드러난다.
    앎을 칼처럼 세우지 않는 사람, 힘을 가진 자리에서도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 제 앞에 놓인 우위를 급히 휘두르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곁에서는 남도 제 목소리를 되찾는다.
    주눅 들지 않고, 함부로 날카로워지지도 않는다.
    상냥함은 남을 위해 자기를 조금 접는 일이다.
    그것은 기질이라기보다 버릇에 가깝고, 버릇이라기보다 오래 지켜 온 마음의 자세에 가깝다.
    상냥한 사람은 종종 세상을 모른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거친 결을 충분히 만져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울 수 없다.
    함부로 말하면 말이 어떻게 사람 안에 박히는지, 차갑게 굴면 하루가 얼마나 오래 식어 가는지 아는 사람만이 입안의 날 선 말을 거두어들인다.
    상냥함은 순한 성미가 아니라 절제다.
    당장 되돌려줄 수 있는 거친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죽이는 힘이다.
    자기의 피로를 남에게 옮기지 않으려는 결심이다.
    그래서 나는 상냥함을 도덕의 가장 낮은 자리이자 가장 높은 자리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말할 수 있으나 아무나 해내지는 못하는 일.
    거창한 신념 없이도 매일의 얼굴과 말투로 증명해야 하는 일.
    상냥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을 하기 이전에 다만 자기 앞에 온 한 사람을 덜 외롭게 한다.
    그 조용한 일이 사람을 살린다. 그 조용한 일이 세상을 바꾼다.
    세상은 큰 주장보다 그런 작은 보살핌으로 더 오래 버텨 왔는지도 모른다.
    끝내 남는 것은 소유가 아니다.
    한때의 명성과 재능도 아니다.
    사람 곁에 남는 것은 그가 누구를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기억이다.
    내게 상냥함은 그 기억의 형식이다.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기에 나누고,
    모두가 같은 사람이기에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
    품위는 가장 낮지만 가장 높은 곳에 있다.
  3. 260106 체형 교정 밸런스랩 등록

    헛된 고민과 삿된 상념에 처진 어깨를 재구축하려고
    한껏 스트레칭을 한다.
    시선을 돌아 세우면 등 뒤의 모든 상황이 일시정지라도 되는 듯,
    겁 먹은 꿩 마냥 눈 돌려 살았던 세월,
    목석과 같이 단단해진 몸은 굳건함 보담도 고집의 상징과도 같아서,
    굽히지 못하던 신념과 굽히지 않던 편견 사이에서,
    나의 몸은 또 닳고 또 굳어 있게 마련인 즉.
    비명 지르듯 뻗은 나의 손과 발 끝에 땀 맺히는 광경 생소하다.
    열매 맺음이 오롯이 노력의 산물이라면,
    사사로이 맺힌 잘못과 잘못의 결론이 저와 같았으면 하는 바람과 달리,
    송글거리다 이내 맺히고 떨어지는 모든 순간 순간에,
    옳고 그름에 닮은 바 하나 없는 찰나로도 기록하지 못할 시간의 터울.
    나는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가도,
    말해야하는 순간에는 항상 이렇듯
    먹먹한 잔구름으로 남는 것이다.
    안개를 빚는 사람은 종종
    이리도 깊은 한숨을 삼키려고
    묵묵히 말을 아끼나 보다.
  4. 260613 꿈을 키우는 집 아이들과

    날씨가 웃고 있었다.
    구름도 웃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창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세상이 온통 웃음으로 가득해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웃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달에는 내게 행운이 하나 찾아왔다. 동생이 가입해 있는 모임의 보육원 행사에 함께 가자고 권한 것이다. 동생은 본래 무엇이든 꼼꼼히 따져 보는 성격이라, 그가 권할 정도면 적어도 요상한(?) 모임은 아니리라는 안심이 먼저 들었다. 나 또한 아이들을 좋아하는 데다, 매일 집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생활에 조금 지쳐 있던 터라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아이들이 낯을 가리면 어쩌나 하는 작은 불안이 없진 않았지만, 그 정도의 불안은 부풀어 오르는 기대 앞에서 이내 납작해지고 말았다.
    삼성화재 모빌리티 박물관에 도착하니 삼삼오오 나들이 나온 가족들과, 그에 비례하는 웃음들이 보였다. 이런 웃음밭에 서 있으면 제아무리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라도 절로 웃음에 물들어 눈꼬리가 순해질 법하다. 평소 표정이 많이 없는 편인 내가 바로 그 표본이 아닐까 싶었다.
    잠시 기다리니 아이들과 다른 모임분들이 도착했다. 관상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살며 쌓인 눈썰미만으로도 그 얼굴들에 깃든 선함을 읽기엔 충분했다. 어릴 적 지독히 낯을 가리던 꼬마였던 나를 떠올리며 품었던 불안은 그제야 가셨다.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에게도 장난스레 말을 걸 줄 안다는 것은, 그 마음에 허물이 없다는 것이자 그들이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사실만으로 가슴 어딘가에 감동이 차올랐다.
    함께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견학에 앞서, 짧은 틈에도 온 열정을 쏟아 아이들과 놀아 주는 한 모임분을 보았다. 오랫동안 답하지 못했던 물음, 선함이란 무엇인가 혹은 사람은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의 실마리가 그 모습 어딘가에 놓여 있는 듯했다. 막상 아이들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잘 놀 자신이 있었는데, 그 넘치는 에너지를 다 받아 내다가는 이미 노후로 접어든 관절이며 근육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공포가 슬며시 들기도 했다.
    이후 조를 나누어 박물관을 탐방하기로 했다. 나는 첫인상이 어딘가 션·정혜영 부부를 닮은 분들과, 서진이라는 중학생 아이와 한 조가 되었다. 서진이에게 말을 거는 일은 (내가 그맘때 한창 사춘기였다는 기억이 떠올라) 처음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마디씩 찔러 넣어 보니, 곧잘 대답을 해 주는 데다 이 어수룩한 어른을 깔보는(다시 말하지만, 내가 그랬으므로) 기색도 없어 금세 긴장이 풀렸다.
    박물관에서는 전시 정보로 문제를 내고 답을 적게 한 팜플렛을 나눠 주고 있었다. 서진이는 팜플렛을 받아 들자마자 문제 풀기에 몰두했다. 아이들이란 그저 노는 걸 더 좋아하리라는(이 또한 내가 그랬으므로) 내 편협한 짐작이 깨지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간중간 체험 활동을 하면서도 문제 풀기야말로 메인 요리라는 듯 거기에 골몰하는 서진이를 보며, 지난날에 대한 잔잔한 후회와 함께 저 재능을 잘 가꾸면 학업에도 큰 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서가 부족한 문제 앞에서 서진이가 자연스레 소거법을 꺼내 드는 모습은 적잖이 놀라웠다. 생각을 구조화하는 연습이 조금만 보태진다면, 능히 두각을 드러내고 스스로도 제법 재미를 붙일 것이다. 개러스 무어의 그 다양하고 재밌는 퍼즐과 퀴즈 책들을 사 주면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니 언젠가 한 권 들고 가 함께 풀어 보면 즐겁겠다 싶었다.
    오후 3시 무렵 관람을 마쳤다.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뻤다. 내게 허락된 기쁨의 그릇이 가득 차 넘치는 기분마저 들었다. 헤어질 때는 못내 아쉬웠지만, 다시 볼 기회가 남아 있으니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서진이에게는 어른들과 놀아주느라 너무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건넸다.
    수원으로 돌아와 모임분들과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조금 전 헤어진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이, 마주 앉은 모임분들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이상하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 까닭을 잠시 헤아려 보았다.
    추측한 바 하나는 아이들의 행복이 우리에게 옮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딘가 조금씩 아이를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 무엇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이들의 모습이, 모임분들의 모습이 내가 닮고 싶은 모습임에는 틀림 없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 아침의 그 웃던 날씨가 다시 떠올랐다.
    세상이 온통 웃고 있다고 느꼈던 건, 어쩌면 내가 잠시 아이로 돌아가 웃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마다의 창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오래 닫아 두었던 창 하나를 그날 다시 연 셈이었다.
    아이의 창을 말이다.
    먼지 쌓인 창틀 너머로 잠깐 동안 스며든 웃음 닮은 햇볕이,
    잔향처럼 오래 마음에 남을 것만 같다.


  5. 260308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건 마음의 양식을 얻는 것이라 하던데,
    늘 좁아지기만 하는 마음은
    책을 양껏 먹어도 좀체 나아지지가 않는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린 나의 풍경 속에는,
    호랑이와,
    산신과,
    동앗줄이 있었고,
    관우와,
    유비와,
    조조 또한 있었을 따름인데,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기에 너무도 초라하고,
    잊혀질 존재라기엔 너무나 소중한,
    이 나의 모순은 어떤 낱말로 쓰여지는가ㅡ
    문득 스스로 묻고픈 그런 기분이 든다.
    주인공은 아무래도 조금 멋진 편이 낫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응당
    나도 더 멋지려고 노력하는 편이 낫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은,
    대게 이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 줄을 더 읽건만,
    나의 마음은 한 줄보다 더 작아진다.
    책은 공허한 내 세상은 이만치 키우고,
    키가 크지 않는 나를 영영 작게만 하나 보다.
  6. 251213 친구를 위하여

    2015년 호주에서 처음 만나 모진 시간을 함께 보냈다.
    힘든 일이 많았던 만큼 서로에게 손떼와 얼룩이 남았으나 그게 더러워 보이기는 커녕 볼 때마다 단란한 추억처럼 맘이 설렌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나를 위해 맞춤 주문 제작된 것처럼 딱 맞는 옷이 있기 마련이고 이건 사람도 물건도 매한가지다. 그런 사람이나 물건을 찾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고 기적이라 불러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또 그런 기적으로 맺어진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서ㅡ즉 늙어 가면서도 서로를 더 아름답게만 볼 수 있단 건 시간이 가진 가장 무한한 축복처럼 여겨진다.
    마음이 깊어 간다는 건 오크통에서 잘 숙성되고 있는 위스키와도 같아서 향도 맛도 더 진해지기 마련이다.
    당신과 내가 단순히 늙은 게 아니라 성숙해온 거처럼,
    나와 이 친구와의 관계 또한 세상에 몇 없는,
    엔트로피를 역행하는 아주 희귀하고 또 고귀한 만남이라 칭하고 싶다.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다는 말이 있다.
    가끔은 이 피할 수 없는 진리 같은 문장이 날카롭게 심장에 꽂히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데,
    작별의 순간을 직감하고 미리 슬퍼하는 건, 상상력을 가진 인간의 슬픈 숙명인 것인지,
    아니면 큰 슬픔에 대비할 수 있는 방파제 같은 것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 내가 아는 게 있다면 내게 조만간 작별이 찾아올 수 있단 사실이고,
    그게 퍽 슬프고 서러워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친구의 상태는 아주 좋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연식을 따지자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라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 밥을 먹이려고 충전 케이블을 연결했더니 잠잠히 아무 반응이 없다.
    원래 같으면 초록불을 번쩍이면서 허겁지겁 전기를 먹곤 하던 친구가 돌연 입맛이 없어졌을 리도 만무한데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태생적으로 내구성이 좋지 않은 마이크로 5핀 단자를 달고 있으니 기어이 올 것이 온 모양새긴 하지만,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당연한 명제에서 주어를 내 곁의 누군가로 특정한다면 전혀 당연할 수 없는 거처럼 마음엔 괜한 소동이 있다.
    가만히 보면 가족의 죽음이 어떤 계기로 인하여 염두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갑자기 사진을 많이 찍는 경향들이 있다.
    눈 앞에서 사라지는 존재를 최대한 부정하기 위한 애달픈 노력일까,
    이 세상을 훌훌 떠나는 사람에게 보다 좋은 추억의 보따리를 안기려는 눈물 겨운 사랑일까.
    나는 노력도 사랑도 서툰 사람이므로,
    단지 여기에 글을 담아 둔다.

  7. 분연히 솎아낼 이성의 필터가 유독 외국어를 할 때면 작동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영어가 짧은 탓에 그때그때 생각나는 간단한 단어들로 내 의사를 표현하곤 하는데,
    가장 쉽게 설명하는 나의 의사가 곧 내 진심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그런 말로부터 배운다.
    나는 나의 편견과, 나는 나의 오만과 또 오만 가지 안 좋은 습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밀한 성분이야 어쨌든 사람 모양으로 서 있는 노력이 또 가상하여서,
    그나마 하나를 고쳤다면 어제보다는 나으리라 매번 자위하는 낌새는 별달리 새로울 것도 없다.
    스스로 축복해야만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외로운 것들 가운데에,
    유독 설핏 엮은 핑계로 자축하는 존재를 말하자면,
    무릇 정당함이란 곧 등가교환에 있다는 퀴퀴하고 따분한 격언을 앞세우게 된다.
    정당히 외롭고, 또 정당히 발전할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여도,
    그런 대단스러운 이 몸은 집 떠난 자리에서 불과 한 발짝쯤은 멀어졌을까.
    허허, 설령 그게 아니래도 물론,
    거스를 잔돈은 없다.
  8. 위임은 비용을 없애지 않습니다. 옮길 뿐입니다
    핵심

    "알아서 해줘"는 자유를 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대개는 탐색 비용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말입니다. AI는 그 비용을 토큰과 컨텍스트로 치르고, 사람은 시간·주의력·정치적 에너지로 치릅니다. 좋은 위임은 목표·맥락·기준·권한·검증을 함께 설계하는 일입니다.
    밤 11시, 한 개발자가 화면을 봅니다. 오후에 "기존 거 참고해서 만들어줘"라는 한 줄을 받았고, 지금 그는 만들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파일이 기준인지 모르니 폴더를 열었다 닫다 하고, 노션을 뒤지고, 작년 문서가 아직 유효한지 메신저로 묻고 답을 기다립니다. 옆 화면에서는 그가 시킨 AI 에이전트가 같은 일을 더 빠르게 하고 있습니다. 닥치는 대로 파일을 읽고, 컨텍스트 창이 무관한 코드로 차오르고, 그럴수록 답은 흐려집니다. 둘 다 일하는 게 아니라 헤매고 있습니다.
    "알아서 해줘." 이 한마디는 자율성을 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대개는 일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비용을 통째로 떠넘기는 말입니다.
    같은 시간, 옆 팀 마케터는 "관련 자료 보고 캠페인 방향 정리해줘"라는 한 줄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자료가 어디 있는지, 어느 것이 최신인지, 누구 말이 기준인지 적힌 데가 없어서, 그는 캠페인을 설계하기 전에 먼저 캠페인을 설계해도 되는 조건을 복원하는 중입니다. 담당자를 찾고, 옛 문서를 뒤지고, "이 방향 맞나"를 세 번째 묻습니다.
    개발자도, 에이전트도, 마케터도 실행이 아니라 탐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탐색은 공짜가 아닙니다. 모호한 위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받는 쪽의 비용으로 이름만 바꿔 그 자리에 남습니다.

    모호한 위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받는 쪽의 비용으로 이름만 바꿔 남습니다.
    그러니 일을 잘 맡기는 법은 더 좋은 지시문을 쓰는 기술이 아닙니다. 일을 건네기 전에 한 가지를 묻는 습관입니다. 이 모호함의 비용을, 누가, 무슨 통화로 치르게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넘긴 일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받는 쪽 어딘가에 청구서로 쌓입니다.
    깔아 둔 대로 따라 합니다
    그 개발자가 다음 날 받은 코드를 엽니다. 에이전트는 중복을 충실히 복제했습니다. 코드베이스에 같은 함수가 세 군데 있었으니, 네 번째를 그 자리에 더 만들었을 뿐입니다. 테스트가 없는 코드였으니 테스트 없이 고쳤고, 임시방편이 많았으니 그것을 이 프로젝트의 관습으로 배웠습니다. AI는 기존 코드베이스를 참고한 게 아닙니다. 그 품질을 그대로 증폭했습니다.
    받는 쪽은 깔아 둔 것을 따라 합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결정이 문서로 남지 않고, 중요한 말은 회의에서만 오가고, 리뷰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조직에서는, 유능한 사람도 평범한 결과를 냅니다. 특히 새로 합류했거나 다른 팀에서 왔거나 그 프로젝트를 처음 보는 사람은 "우리 방식"을 거의 모른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개인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시스템이 그 결과를 정확히 그렇게 주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과가 나빴을 때 던질 첫 질문은 "누가 못했나"가 아닙니다. "무엇이 이 결과를 주문했나"입니다. 개인 역량 문제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 문제는 사람을 갈아 끼워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터집니다.
    안 보이면 없는 겁니다
    그 마케터가 사흘을 들여 캠페인 방향을 짜 옵니다. 회의에서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거 작년에 해봤는데 안 됐어요." 그 결론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케터는 이미 끝난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했고, 그 사흘은 누구의 시간으로도 환불되지 않습니다.
    AI에게 보이지 않는 정보는 없는 정보입니다. 사람에게 공유되지 않은 정보도 사실상 없는 정보입니다. "예전에 논의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이에요", "그건 분위기상 안 돼요" — 이런 말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으면 새로 온 사람도 모르고, AI는 더더욱 모릅니다. 사람은 그나마 분위기라도 읽지만, AI는 컨텍스트에 없으면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암묵지를 명시지로 바꾸는 일은 AI를 위한 작업처럼 보여도, 사람에게 똑같이 이득입니다.
    그 마케터가 다음 주에 합류한 동료에게 프로젝트를 넘깁니다. 인수인계는 복도에서 이뤄졌습니다. 30분, 구두로. 메모도 없고, 슬랙 스레드도 없고, 문서에 한 줄도 남지 않았습니다. 회의록이라면 참석자라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구두 인수인계에는 그것도 없습니다 — 그 맥락은 처음부터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새 동료에게도 없고, AI 에이전트에게는 더더욱 없습니다. 읽을 것 자체가 없으니까요.
    멈출 줄은 사고 전에 매답니다
    도요타 공장에는 지도카가 있습니다. 이상이 생기면 기계가 스스로 멈추고, 안돈 보드에 불이 들어와 문제가 즉시 드러나며, 불량은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동화가 아니라 멈춤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멈춤을 가능하게 하는 줄이 사고가 난 뒤가 아니라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매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멈출 수 있는 통로는 사후에 찾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맡길 때 함께 깔아 두는 것입니다. [1][2]
    문제는 대부분의 조직이 그 줄을 매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 마케터의 팀도 실패를 기록은 합니다. 회고록을 쓰고, 포스트모템을 남기고, "다음엔 잘하자"고 적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는 폴더에서 잠듭니다. 그래서 다음 분기, 다른 사람이 같은 실험을 또 합니다.
    Google의 사이트 신뢰성 엔지니어링(SRE)은 그 줄을 매답니다. 포스트모템을 쓰는 데서 끝내지 않고, 검토하고, 조직 저장소에 남기고, 다른 팀이 찾아 배우게 합니다. SRE 책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못 박습니다.
    Google SRE Book — Postmortem Culture
    "An unreviewed postmortem might as well never have existed."
    검토되지 않은 포스트모템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3]
    그런데 그 줄에는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패의 진짜 경위를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고가 범인을 찾는 자리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사고의 진짜 경위를 숨깁니다. 그리고 숨겨진 경위 위에서는 어떤 시스템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부러집니다. Etsy의 존 올스포가 2012년 "Blameless PostMortems and a Just Culture"에서 짚은 지점이 이것입니다. 비난 없는 회고는 착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신호가 위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4]
    핵심은 "실패를 적었는가"가 아니라 "그 실패가 다음 체크리스트·기준·자동화·지표를 바꿨는가"입니다.
    flowchart LR F["실패 발생"] --> Q{"무엇을 하는가?"} Q -->|"그냥 넘긴다"| W["같은 실수 반복<br/>빨라 보이는 비싼 반복 · 낭비"] Q -->|"구조를 바꾼다"| L["체크리스트 · 기준 · 지표가 바뀜<br/>학습"] 빈 선반은 누군가의 야근입니다
    구조를 바꾸는 것이 실패 뒤의 학습이라면, 구조를 미리 세우는 것은 그 실패가 필요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속도가 그 준비를 앞지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한 거대 유통업체가 보여 줍니다.
    Target은 "2013년 말까지 캐나다에 124개 매장"이라는 공격적 목표로 진출했습니다. 124라는 숫자는 분명한 지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매장을 지탱할 공급망과 재고 시스템은 일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매장은 빠르게 늘었고, 빈 선반과 재고 불일치, 그리고 미국 가격을 기대한 소비자가 마주한 더 높은 가격이 고객 경험을 무너뜨렸습니다. [5]
    매장을 몇 개 열었는지는 성과가 아닙니다. 그 매장을 시스템이 지탱했는지가 성과입니다. 빠른 실행은 준비 부족을 잠깐 가릴 뿐, 그 자리를 메워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준비 부족의 비용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빈 선반 앞에서 발길을 돌린 고객과, 엉킨 재고를 수습하느라 매대 뒤에 남은 직원의 하루로 옮겨갔을 뿐입니다.
    누군가 이상하다고 느낄 때만 멈춥니다
    이 멈춤 장치에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아직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을 때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규격을 벗어난 무언가를 한 번 받아들이고, 별일 없자 또 받아들이면, 어느새 그것은 예외가 아니라 정상으로 보입니다. 사회학자 다이앤 본은 이것을 일탈의 정상화라고 불렀습니다. [6]
    1986년 챌린저호가 그 끝에 있었습니다. 로저스 위원회는 기술적 원인을 추운 날씨에 탄성을 잃은 O링 파손으로 지목했지만, 더 무거운 것은 조직적 원인이었습니다. 사이오콜 엔지니어들은 저온 발사를 우려했지만, 계약사 경영진이 막판 회의에서 발사 권고로 입장을 뒤집었고, 잠재적 문제는 위로 올라가기보다 내부에서 봉합됐습니다. [7] 신호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규격 이탈이 너무 오래, 너무 자연스럽게 정상으로 취급돼서, 그것을 멈춰야 할 신호로 보는 사람이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요타의 줄과 SRE의 회고가 끝내 답하지 못하는 지점입니다. 멈추는 줄도, 회고도, 누군가 "이건 이상하다"고 느껴야 당겨집니다. 그 감각이 마모되는 것을 막으려면, 규격 이탈을 위로 강제로 끌어올리는 통로를 — 그것이 정상으로 굳기 전에 — 위임의 일부로 미리 설계해 두어야 합니다. 에이전트 시스템에서는 이 마모가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납니다.
    챗봇이 지어낸 답의 청구서
    다시 누군가가 화면 앞에 있습니다. 이번엔 한 항공사 고객입니다. 그는 사별 할인 운임을 챗봇에 물었고, 챗봇은 실제 정책에 없는 "먼저 결제하고 90일 안에 소급 환불받을 수 있다"는 답을 지어냈습니다. 그는 그 말을 믿고 항공권을 샀습니다.
    에어캐나다는 고객 응대를 웹사이트 챗봇에 맡겼습니다. 환불은 거부됐고, 회사는 챗봇이 "별개의 법적 실체"라 그 말에 책임질 수 없다고 다퉜습니다. 2024년 브리티시컬럼비아 민사재결심판소(CRT)는 이를 "주목할 만한 주장"이라 부르며 일축했고, 정적 페이지든 챗봇이든 자사 웹사이트의 모든 정보에 회사가 책임진다고 판단했습니다(배상 등 약 812캐나다달러). [8]
    검증 통로 없이 맡긴 일의 비용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잘못된 답을 믿은 고객이, 다음에는 배상과 평판으로 회사가 치렀습니다. AGENTS.md도, 사실 확인 단계도, "이 답을 검증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멈춤 줄도 없는 위임 — 그 개발자의 야근, 그 마케터의 사흘과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받는 쪽만 바뀌었을 뿐, 비용은 같은 길로 옮겨갑니다.
    두 세계, 같은 법칙
    여기서 잠깐 멈춰서, 두 세계를 나란히 놓아 봅니다. 한쪽에는 프롬프트와 컨텍스트 창과 코드베이스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업무 지시와 시간과 조직 관행이 있습니다. 표면은 전혀 다른데, 빈칸이 생겼을 때 벌어지는 일은 같습니다.
    AI에게 일을 맡길 때
    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
    같은 법칙
    프롬프트
    업무 지시
    말만 잘한다고 풀리지 않습니다
    컨텍스트 창
    시간·주의력·이해도
    잡음이 많으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검색 · RAG
    문서 탐색 · 질문
    "알아서 찾아봐"는 비용 전가입니다
    코드베이스
    기존 산출물 · 조직 관행
    깔아 둔 선례를 그대로 복제합니다
    규칙 파일 · AGENTS.md
    온보딩 문서 · 업무 가이드
    암묵지를 명시지로 바꿔야 합니다
    테스트 · 린터 · CI
    체크리스트 · 리뷰 · 승인
    실수를 개인 능력에만 맡길 수 없습니다
    하네스
    업무 시스템
    좋은 결과가 반복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환각
    오해와 추측
    빈칸은 결국 상상으로 채워집니다
    재시도 · 평가 루프
    피드백 · 회고 루프
    한 번에 끝내지 않고 결과로 다음을 고칩니다
    여기가 이 글의 경첩입니다. 처음에는 AI에게 일 시키는 법과 사람에게 일 시키는 법이 별개의 기술처럼 보였습니다. 아닙니다. 하나의 법칙이 두 표면에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빈칸을 비워 두면 AI도 사람도 그 칸을 상상으로 채웁니다. 물론 양쪽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경력과 평판이 걸려 있어 나쁜 소식을 숨길 동기가 있고, AI에게는 그 동기가 없는 대신 분위기를 읽어 빈칸을 메울 능력도 없습니다. '비난 없는 회고'가 사람 쪽에서 작동하고 AI 쪽에서는 말 자체가 무의미한 이유가 거기서 갈립니다. 그러니 표가 말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같은 법칙입니다.
    그 한마디가 정답일 때
    여기서 가장 강한 반론을 정면으로 세웁니다. 때로는 "알아서 해줘"가 정확히 옳은 말입니다. 노련한 사람에게 목표·맥락·기준·권한·검증을 다 못 박아 건네는 것은 그의 판단력을 죽이는 일입니다. 시니어가 자기 방식으로 길을 내는 자유, 정의되지 않은 빈칸을 스스로 메우며 성장하는 자유 — 그 모호함은 비용이 아니라 신뢰와 성장에 대한 의도된 투자입니다. 좋은 리더는 모든 것을 명세하지 않고 일부러 비워 둡니다. 과잉 명세는 사람을 지시 대기자로 만들고, 결국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의존을 길러 냅니다. 이 반론은 약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유능한 사람이 과잉 관리 아래서 시들고, 적당한 모호함 속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이 반론은 한 가지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옹호하는 것은 모호한 위임이 아니라 명확한 위임 안의 넓은 해결 자유입니다. 노련한 사람에게 맡길 때 비워 두어야 하는 칸은 "어떻게 풀 것인가"이지,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나 "무엇이 기준인가"가 아닙니다. 목표·기준·검증을 분명히 한 채 해결 방식을 통째로 맡기는 것 — 그것이 바로 신뢰 투자이고 성장의 공간입니다. 반대로 목표가 흐리고 기준이 사후에 바뀌는 모호함은 신뢰가 아니라 방치입니다. 그 안에서 시니어가 키우는 것은 판단력이 아니라, "이 방향 맞나"를 묻고 다니는 정치적 감각입니다. 신뢰 투자라는 말은 옳습니다 — 단,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못 박을지 정확히 알 때만. 비울 칸과 비워선 안 될 칸을 구분하지 못한 채 던지는 "알아서"는 투자가 아니라, 이 글 내내 보아 온 그 청구서입니다.
    자율을 뺏는 게 아니라 추측을 줄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지시하면 상대의 자율성을 빼앗는 것 같다는 흔한 불안은 절반만 맞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필요한 것은 자율성을 거두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추측을 거두는 일입니다. 그 개발자가 밤 11시에 쓴 에너지는 문제를 푸는 데가 아니라, 어느 파일이 기준인지 추측하는 데로 샜습니다. 좋은 지시는 그 추측을 거둘 뿐, 자유를 없애지 않습니다.
    나쁜 자유는 받는 쪽이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누구 말이 기준인지, 어떤 문서가 최신인지, 어디까지 손대도 되는지, 나중에 어디서 혼날지를 전부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자유입니다. 이건 자율이 아니라 방치에 가깝습니다. 좋은 자유는 목표가 분명하고, 제약이 분명하고, 성공 기준이 분명하고, 참고할 것이 정리돼 있고, 그 안에서 해결 방식은 온전히 맡기는 자유입니다.
    창의성은 경계가 없을 때가 아니라 경계가 분명할 때 나옵니다. 무엇이 고정이고 무엇이 열려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새것을 만들지 못합니다. 열린 자리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만이 거기에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좋은 위임이 줄이는 것은 창의의 공간이 아니라, 창의에 닿기도 전에 추측으로 새어 나가는 비용입니다.
    다섯 기둥을 미리 세웁니다

    지시는 한 줄이면 되지만, 시스템은 이 다섯 기둥을 미리 세워야 합니다.
    여기까지의 장면들은 모두 시스템이 없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장면들을 그대로 뒤집으면, 일을 맡기기 전에 깔아 두어야 할 목록이 됩니다. 목표가 빠지면 "무엇을 만들지"는 채워도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가 비어 바쁘기만 합니다. 맥락이 빠지면 받는 쪽이 실행 전에 최신본부터 탐색합니다 — 그 마케터의 사흘처럼. 기준이 빠지면 성공이 일 끝난 뒤에 정의되고, 피드백이 함정이 됩니다. 권한이 빠지면 결정마다 멈춰 묻거나, 묻지 않고 잘못 갑니다. 검증이 빠지면 문제가 정상으로 굳을 때까지 아무도 줄을 당기지 않습니다 — 챌린저호처럼, 그 챗봇처럼.
    이론은 단순한데 현장은 늘 같은 데서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두 개의 실물 도구를 둡니다. 하나는 일을 맡길 때, 하나는 실패한 다음에.
    나쁜 요청 — 받는 쪽이 탐색부터 해야 합니다
    "관련 자료 보고 캠페인 방향 정리해줘."
    "기존 거 참고해서 제안서 만들어줘."
    "AI한테 맡겨서 초안 뽑아봐."
    좋은 요청 — 탐색할 것이 거의 남지 않습니다
    "이번 목표는 신규 고객의 첫 구매 전환율을 높이는 것입니다. 타깃은 최근 30일 내 가입했지만 구매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참고 자료는 A와 B이고, C는 예전 방향이라 배경용으로만 보면 됩니다. 성공 기준은 클릭률이 아니라 구매 전환율입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메시지 가설 3개와 각 가설의 리스크를 정리해 주세요. 수요일에 방향만 먼저 확인합시다."
    실패한 다음, 순서대로 묻습니다
    무슨 결과를 기대했고, 실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실패를 뒤늦게 알았는가, 중간에 알 수 있었는가?
    목표·타깃·기준·권한·일정 중 무엇이 불명확했는가?
    자료나 컨텍스트에 최신이 아닌 것이 섞여 있었는가?
    이번 실패에서 다음에 재사용할 학습은 무엇인가?
    체크리스트·템플릿·리뷰 기준·자동화·지표 중 무엇을 바꿀 것인가?
    그 변화가 결과를 실제로 개선했는지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AI에게 일을 잘 시키는 법은 프롬프트를 예쁘게 쓰는 기술에서 좋은 하네스를 짓는 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일을 잘 시키는 법도 정확히 같은 궤적입니다. 좋은 리더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미리 깔아 두는 사람입니다.
    닫으며
    다시 밤 11시입니다. 다른 개발자가 화면을 봅니다. 오늘 그가 받은 것은 한 줄이 아니라,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어느 문서가 기준인지·어디까지 손대도 되는지·금요일 전에 무엇을 검증할지가 적힌 한 문단입니다. 폴더를 열고 닫는 대신, 그는 곧장 문제로 들어갑니다. 옆 화면의 에이전트도 더 이상 컨텍스트 창을 잡음으로 채우지 않습니다 — 무엇이 기준인지 이미 적혀 있으니까. 같은 시각, 같은 책상, 같은 한 줄이 들어갈 자리. 달라진 것은 그 자리에 무엇을 깔아 두었는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에게 — AI든 사람이든 — "알아서 해줘"라고 말하기 전에, 한 번만 물으십시오. 이 모호함의 비용을, 누가, 무슨 통화로 치르게 되는가.
    참고자료
    [1] Toyota Motor Corporation, "Toyota Production System." https://global.toyota/en/company/vision-and-philosophy/production-system/
    [2] Toyota Motor Manufacturing UK, "Jidoka." https://www.toyotauk.com/toyota-in-the-uk/how-we-manufacture/jidoka
    [3] Google SRE Book, "Postmortem Culture: Learning from Failure." https://sre.google/sre-book/postmortem-culture/
    [4] John Allspaw, "Blameless PostMortems and a Just Culture," Etsy Code as Craft, 2012. https://www.etsy.com/codeascraft/blameless-postmortems
    [5] Joe Castaldo, "The Last Days of Target Canada," Canadian Business, 2016. https://canadianbusiness.com/ideas/the-last-days-of-target-canada/ (재수록: Maclean's https://macleans.ca/economy/economicanalysis/off-target-how-a-u-s-retail-giant-misread-the-canadian-market/)
    [6] Diane Vaughan, The Challenger Launch Decision: Risky Technology, Culture, and Deviance at NAS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7] Report of the Presidential Commission on the Space Shuttle Challenger Accident (Rogers Commission), 1986 — Vol. I, Ch. IV "The Cause of the Accident"(O링 물리적 원인, https://www.nasa.gov/history/rogersrep/v1ch4.htm) 및 Ch. V "The Contributing Cause of the Accident"(조직적 의사결정 결함, https://www.nasa.gov/history/rogersrep/v1ch5.htm).
    [8] Moffatt v. Air Canada, 2024 BCCRT 149, British Columbia Civil Resolution Tribunal, 2024-02-14 — 웹사이트 챗봇의 잘못된 안내에 회사가 책임진다고 판단(과실 부실표시, 약 812캐나다달러). https://www.canlii.org/en/bc/bccrt/doc/2024/2024bccrt149/2024bccrt149.html · 보도: CBC News, 2024-02-16 https://www.cbc.ca/news/canada/british-columbia/air-canada-chatbot-lawsuit-1.7116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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