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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서울엔


사이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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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집 화단엔 동백나무 꽃이 피었고 내 고향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몇 년 전 80년대 풍의 촌스러운 뮤직비디오 하나가 첫눈에 불쑥 내 마음 깊이 들어와버렸다. 게다가 가수도 내가 애정하는 검정치마였다. 미국에서 살다 온 가수가 '내 고향 서울엔'이란 노래를 쓴 것도 퍽 재미있었지만 서울을 떠나지도 않았음에도 막연한 향수에 젖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왜 고향은 의미가 있는 걸까?
분명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겠지.
사랑하는 사람들, 좋았던 일들, 애착이 가는 장소들.


어쩌다 흘러흘러 제주도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참 어색했던 것이 있다. 지어진지 얼마 안된 신도시여서 휑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추억 하나 떨어진 것이 없었던게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냥 이런 느낌이었다. 추억이 없는 거리는 맛이 없었다. 앙꼬 없는 붕어빵을 퍽퍽하게 씹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앙꼬가 없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나보다. 그저 지금에 집중해서 적응해 나가는데 하루하루를 썼다. 적은 수이긴 하지만 친한 사람들이 생기고 제주도민으로서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추억 하나 없이 어색했던 제주 동네 거리에도 여기 저기 추억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였을거다. 출근하는 자동차 안에서 '내 고향 서울엔'을 다시 듣기 시작한 것이.  제주에서 작은 추억들이 생기자 마치 마중물이 된 양 서울의 추억들이 물밀듯이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락시장의 순대국, 은마 상가 만나분식의 떡꼬치, 개포동의 닭칼국수, 석촌동의 곱창 볶음, 문정동의 마약 떡볶이, 엄마손백화점 근처의 횟집. 제주에서 만날 수 없는 맛들이 그리움을 자극하더니 이내 동네를 떠난 친구들, 내가 살던 서울의 222동, 다니던 학교들까지 내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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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나는 늘 이방인이다.
정말 한 다리 건너 괸당(친척)인 이 곳에선 내가 50년을 살아도 이방인이다. 그냥 '서울 사람'이다. 서울 사람으로서 소속감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내가 여기 와서는 서울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매우, 자주, 많이 확인받는다. 지역의 배타성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하고 자라온 나에겐 불편한 벽이다. 차라리 외국처럼 확 다른 문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비슷한 말을 쓰고 같은 국가의 영토에 사는데 문화의 벽이 느껴지니 양말에 가시 들어간 것 마냥 불편함을 종종 느낀다.


문득 고향이 좋은 것은 단순 추억이 많아서가 아님을 깨닫는다. 적어도 그 곳에선 내가 조연이라도 맡고 있었고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유난히 공동체적인 삶을 좋아했다. 비록 슈-퍼 인사이더는 아니고 아싸와 인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좀 내 맘대로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공동체에서 벗어나도 잠깐 뿐, 마치 소풍 다녀온 것처럼 울타리 안으로 쏙 들어갔던 사람이다. 그 잠깐 벗어난 일종의 '나들이'를 큰 '모험'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는지도 모르지. 결국 고향이란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이 많은 공동체였음을 깨닫는다.


제주에서 태어난 내 아들은 주민등록번호 뒷번호 두번째자리가 9로 시작된다. 아빠 엄마는 서울 사람이지만 큰 변화가 없으면 제주 사람으로 살겠지. ‘밥 먹었어?’라는 말보단 ‘밥 먹언?’ 이라는 제주 사투리가 익숙한 채로 이곳에서, 이곳 사람들과 추억과 공동체를 만들어 마음 속의 고향을 형성해 가겠지. 아들은 나중에 여기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제주도의 푸른밤 노래를 들을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고향을 마음 속에서 그리는 순간이 올까?

 

22/2/14

  • Like 3

6 개의 댓글


추천 댓글들

  • 커뮤니티 안내자

@사이시옷님 글을 엄청 잘 쓰시내요. 제가 닮고 싶은 글 쓰기 방법, 눈에 떠오르듯 촉감이 느껴지듯 목소리가 들여오듯 맛과 냄새가 떠오르듯 글을 쓰시내요.

이전 헵타베이스 위키 페이지 만드셨을 때의 글과 너무 달라서 어색할 정도입니다.

생산성과 성장 등을 고민하면서 동시에 이런 글을 쓰신다는게 너무 멋지십니다.

+

저는 캘리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다 뉴욕으로 넘어왔는데, 저는 마치 고향이 2개인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국과 캘리.

특히 뉴욕의 우중충한 날 마천루 사이를 걷다가 회색빛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캘리의 하늘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뉴욕에서 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힘들 때마다, 한국과 캘리를 떠올렸던거 같아요.

많은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나온 후로 시간이 멈춘거 같은 삶의 경험을 많이 하는데, 어릴 때 함께 시간을 보낸 지인들과 떨어져서 일까요? 저만 혼자 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을때가 많은데, 제주에서의 삶도 그런걸 느끼실 때가 있으실까요? 

문득 제 나이도 잊고 살다가, 아이들 큰 거보고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나가버렸구나 새삼 깨닫습니다.

친구 부모님들 장례 소식을 듣고 멀리에서나마 호환을 보내다가 이제는 하나 둘 먼저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또 세월을 느낍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일요일 아침, 커피 한잔과 함께 @사이시옷님 글을 음미하면서 읽는게 참 즐거운 경험이내요! 

  • Lik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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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TITAN 정회원
6 hours ago, Key said:

@사이시옷님 글을 엄청 잘 쓰시내요. 제가 닮고 싶은 글 쓰기 방법, 눈에 떠오르듯 촉감이 느껴지듯 목소리가 들여오듯 맛과 냄새가 떠오르듯 글을 쓰시내요.

이전 헵타베이스 위키 페이지 만드셨을 때의 글과 너무 달라서 어색할 정도입니다.

생산성과 성장 등을 고민하면서 동시에 이런 글을 쓰신다는게 너무 멋지십니다.

+

저는 캘리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다 뉴욕으로 넘어왔는데, 저는 마치 고향이 2개인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국과 캘리.

특히 뉴욕의 우중충한 날 마천루 사이를 걷다가 회색빛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캘리의 하늘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뉴욕에서 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힘들 때마다, 한국과 캘리를 떠올렸던거 같아요.

많은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나온 후로 시간이 멈춘거 같은 삶의 경험을 많이 하는데, 어릴 때 함께 시간을 보낸 지인들과 떨어져서 일까요? 저만 혼자 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을때가 많은데, 제주에서의 삶도 그런걸 느끼실 때가 있으실까요? 

문득 제 나이도 잊고 살다가, 아이들 큰 거보고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나가버렸구나 새삼 깨닫습니다.

친구 부모님들 장례 소식을 듣고 멀리에서나마 호환을 보내다가 이제는 하나 둘 먼저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또 세월을 느낍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일요일 아침, 커피 한잔과 함께 @사이시옷님 글을 음미하면서 읽는게 참 즐거운 경험이내요! 

칭찬 감사합니다. 제 글쓰기 성향은 어쩌면 이쪽이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오면서 쓴 글들이 대부분 소설, 수필쪽이었으니까요.
저는 늘 글쓰기 표현이 부족한 것 같아 고민인데 즐거워하신다니 저도 무척 기쁩니다.

캘리는 딱 한번 가봤어요. 98년이니 벌써 25년이 흘렀네요.
제가 살던 동부에 비해 따뜻하고 쨍쨍하고 모든 것이 선명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울에 살 때도 동네 친구들이 결혼 후 서울 근교로 이사가버려서 쓸쓸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제주에 오니 더 혼자 떨어진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세컨드브레인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 소속감을 많이 느낍니다. 같이 추억도 많이 쌓고 있구요.
그리고 전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며 고독을 껴안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같이 동네에 살다가 외국으로 나간 친구들이 많았어요.
재미있는건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만나면 쓰는 말투 있잖아요. 그게 옛날 말투더라고요. 마치 과거에 박제된것 같이요.
그러다가 점점 명사가 영어화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한국어지만 다른 한국어. 정체성도 마찬가지겠죠.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이기도 한.
저 같은 거의 순수 한국인(?)은 여러개의 정체성이 멋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은 친구들도 있었지요.

저의 작은 소원중 하나는 캘리에서 서핑을 해보는거에요. 아름다운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신 키님이 부럽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dited by 사이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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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뮤니티 안내자
7 hours ago, 사이시옷 said:

칭찬 감사합니다. 제 글쓰기 성향은 어쩌면 이쪽이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오면서 쓴 글들이 대부분 소설, 수필쪽이었으니까요.
저는 늘 글쓰기 표현이 부족한 것 같아 고민인데 즐거워하신다니 저도 무척 기쁩니다.

아 그러셨군요. 표현 너무 풍부하고 좋은거 같습니다. 전 늘 이런식의 글을 쓰는 분들이 무척이나 부럽더라구요.

7 hours ago, 사이시옷 said:

재미있는건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만나면 쓰는 말투 있잖아요. 그게 옛날 말투더라고요. 마치 과거에 박제된것 같이요.

맞습니다. 시간이 한국을 떠났을 때 멈춘 그런 느낌이 있어요. 여기에서의 삶은 또 계속되었는 말이죠. 

8 hours ago, 사이시옷 said:

그러다가 점점 명사가 영어화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한국어지만 다른 한국어. 정체성도 마찬가지겠죠.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이기도 한.

저는 사실 의도적으로 한국어로 얘기할 때 영어 단어를 최대한 같이 안쓰려고 노력중입니다. 잘 안되지만 과거에 비해서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 )

8 hours ago, 사이시옷 said:

저의 작은 소원중 하나는 캘리에서 서핑을 해보는거에요. 아름다운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신 키님이 부럽습니다.

오 서핑, 좋죠. 엘에이에서 살 때, 늦게까지 공부하거나 무언가 프로젝트를 할 때, 늦은 밤 머리가 복잡할 때, 친구들과 함께 10번 도로 타고 말리부까지 가서 커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아직도 참 강렬하내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캘리가 가끔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대댓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사이트에서 글로 소통하는게 또 다른 매력이 있구나 하고 느끼고 감사해하는 새벽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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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뮤니티 안내자

문득 제가 @사이시옷님이라면 내가 잘 쓰는 글에 더 집중해서 글 쓰기를 할꺼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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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TITAN 정회원
12 hours ago, Key said:

문득 제가 @사이시옷님이라면 내가 잘 쓰는 글에 더 집중해서 글 쓰기를 할꺼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로 예쁜(?) 글들은 굉장히 드물어요.

공감과 쟤왜저래 사이의 줄타기가 심하게 들어가는 류의 글쓰기라서요. 🙂

제가 쓰는 자기계발류(?)의 글에 이런 감성이 녹아들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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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뮤니티 안내자
2 hours ago, 사이시옷 said:

사실 이 정도로 예쁜(?) 글들은 굉장히 드물어요.

공감과 쟤왜저래 사이의 줄타기가 심하게 들어가는 류의 글쓰기라서요. 🙂

제가 쓰는 자기계발류(?)의 글에 이런 감성이 녹아들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림도 엄청 잘 그리시는데, 그 재능을 더 활용하시면 너무 좋을거 같은데요! 

인스타에만 올려도 인기가 많을꺼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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