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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의 삶


사이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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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은 산중턱 - 시골 - 신도시로 이어진다. 회사에서 나와 내리막길을 쭈욱 내려가면 파란 하늘과 바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늘과 바다는 경계선이 희미하다. 여객기와 컨테이너선을 봐야 그 둘을 구분해 낼 수 있다. 한치철이 되면 저녁 바다는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차는데 그게 참 장관이다.

 

  내려오다 보면 작고 구불구불한 길 주위에 푸른 귤밭이 펼쳐지고 옆쪽 공터엔 벌이 붕붕 날아다니는 양봉장도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다. 비릿한 흙내음이 지나가면 꽃의 향기가 코를 가득 채운다. 이곳을 조금 더 지나면 작은 공장과 고철상 사이로 거대하고 낡은 트럭이 미꾸라지처럼 굽이굽이 빠져나가곤 한다.

  회사가 산중턱이라 집 근처에 다다르면 귀가 먹먹해진다. 이제 눈앞에는 아파트로 가득한 신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 아늑한 내 보금자리가 있다. 겉으로는 서울과 꽤나 비슷하다. 아파트 많고 가게 많고. 이렇게 퇴근하는 길의 풍경은 꽤나 다채롭다. 계절마다 변화무쌍해 운전의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서울쥐인 나에게 제주는 재미있는 곳이다.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다. 껍질을 요렇게 까도 저렇게 까도 도시의 모습만 나오는 서울에 비해 한 커풀만 벗기면 귤밭이 펼쳐지는 제주의 모습이 어떤 때는 가냘프고 어떤 때는 사랑스럽다.

  조금만 걸어가도 바다가 펼쳐져 일 년 내내 서핑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차를 타고 20분만 나가 텐트를 쳐도 멀리 여행 온 것 같아 좋다. 조금만 움직여도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시의 껍질이 얇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다. 제주에 온지 4년이 되어가니 서울 가면 먹고 싶은 음식들이 마음속에 줄을 선다. 전국 맛집은 서울에 몰려있다는 말에 격히 공감한다. 제주의 맛집은 대부분 메뉴가 비슷하거나(향토음식) 인스타용(관광용)이다. 그래서 선택의 폭이 좁다. 요즘엔 석촌동의 돼지야채곱창을 먹고 싶다. 잘 가던 분식집의 떡꼬치와 순대볶음도 그립다.

 

  그래도 이젠 서울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다. 이곳이 좋아지는데 퍽 오래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가 싫은 게 아니었다. 이유는 어찌되었던 경쟁하는 삶에서 도태되었고, 실패해서 제주에 왔다 생각했다. 이 장소가 아니라 내 자신이 싫었었다.

  출퇴근길에 흙내음을 맡으면, 서핑 보드 위에 누워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작지만 내 마음을 적당히 채우는 행복감을 느낀다. 마음속의 나는 이제야 조금씩 고요함을 배우는 듯하다.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는 모습도 볕에 내놓은 해삼같이 녹아내렸으면 한다. 작지만 소중한 일상이 지금처럼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0. 5. 13.

Edited by 사이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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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의 댓글


추천 댓글들

  • 커뮤니티 안내자

이 글을 읽고나니 @사이시옷 님이 얼마나 서정적인 글 쓰기를 하시는지 알거 같습니다.

이전 글의 "오렌지색 햇살이 오른쪽 창가를 넘어 넘실넘실 들어차기 시작합니다." 이런 표현이 가득한 글이내요.

글을 쓸 때, 눈에 그려지거나 정겹게 쓰거나 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 재주가 전 참 부럽습니다.

경쟁하는 삶에서 도태되신게 아니고, 게임의 룰을 바꾸신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실패도 아니고, 더 나은 삶으로의 전환 같은 느낌인데요.

저는 제주의 삶이 무척이나 부러운데요!

전 회사는 맨하탄이지만, 집은 기차로 한시간 거리인 롱아일랜드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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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만 되도 전형적인 미국 동네라 조용하고 단조롭고 한산하고 그런거 같아요.

오히려 더 안쪽으로 이사가려고 한참 준비했는데,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지금은 계획을 변경중입니다.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더 안쪽으로 가면 초고속 인터넷이 안되는것도 큰 이유중에 하나였습니다.

직장 때문에 맨하탄에 기차 타고(왕복 2시간) 출퇴근하면서 느끼는게, 매일 매일 전쟁터에 갔다가 안식처로 돌아오는 그런 기분이예요.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토끼 가족들을 일상적으로 보게 되고, 조금만 윗동네 다녀올 때면, 사슴도 만나고 너구리 가족도 만나고요.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맛있는 한국 음식들 먹으려면 한참 운전해서 케이타운까지 가야 한다는건데 이젠 그냥 참을만한거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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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TITAN 정회원
10 minutes ago, Key said:

이 글을 읽고나니 @사이시옷 님이 얼마나 서정적인 글 쓰기를 하시는지 알거 같습니다.

이전 글의 "오렌지색 햇살이 오른쪽 창가를 넘어 넘실넘실 들어차기 시작합니다." 이런 표현이 가득한 글이내요.

글을 쓸 때, 눈에 그려지거나 정겹게 쓰거나 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 재주가 전 참 부럽습니다.

경쟁하는 삶에서 도태되신게 아니고, 게임의 룰을 바꾸신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실패도 아니고, 더 나은 삶으로의 전환 같은 느낌인데요.

저는 제주의 삶이 무척이나 부러운데요!

전 회사는 맨하탄이지만, 집은 기차로 한시간 거리인 롱아일랜드쪽입니다.

image.png.519bf4ea483f2ea4001706e5c73ce28a.png

집 근처만 되도 전형적인 미국 동네라 조용하고 단조롭고 한산하고 그런거 같아요.

오히려 더 안쪽으로 이사가려고 한참 준비했는데,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지금은 계획을 변경중입니다.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더 안쪽으로 가면 초고속 인터넷이 안되는것도 큰 이유중에 하나였습니다.

직장 때문에 맨하탄에 기차 타고(왕복 2시간) 출퇴근하면서 느끼는게, 매일 매일 전쟁터에 갔다가 안식처로 돌아오는 그런 기분이예요.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토끼 가족들을 일상적으로 보게 되고, 조금만 윗동네 다녀올 때면, 사슴도 만나고 너구리 가족도 만나고요.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맛있는 한국 음식들 먹으려면 한참 운전해서 케이타운까지 가야 한다는건데 이젠 그냥 참을만한거 같아요. >.<

저는 반대로 키님의 미국 생활이 참 부럽습니다. 맨해튼의 세계 1위 도시의 느낌과 롱아일랜드 지역의 교외느낌을 동시에 받으실 수 있으시니까요.

어렸을때 버지니아 페어팩스에서 잠시 살았었어요. 비록 IMF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저의 긍정적인 가치관이 다 정립이 되었죠.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풍경이 떠오릅니다. 노란 스쿨버스, 납작했던 고등학교, 스케이트보드, 라크로스, 너바나, 나인인치네일스.
자주, 아주 자주 제가 만약 미국에 남아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하곤 해요. 미국에서의 삶이 진정 행복했었거든요.

그래서 키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귀가 더 쫑긋 세워집니다.

이사가고 싶으신 곳에 초고속 인터넷이 아직도 안된다니 놀랍습니다. 미국은 확실히 지역마다 온도차가 큰 느낌이네요. 나중에 키님의 미국 생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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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뮤니티 안내자
34 minutes ago, 사이시옷 said:

저는 반대로 키님의 미국 생활이 참 부럽습니다. 맨해튼의 세계 1위 도시의 느낌과 롱아일랜드 지역의 교외느낌을 동시에 받으실 수 있으시니까요.

어렸을때 버지니아 페어팩스에서 잠시 살았었어요. 비록 IMF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저의 긍정적인 가치관이 다 정립이 되었죠.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풍경이 떠오릅니다. 노란 스쿨버스, 납작했던 고등학교, 스케이트보드, 라크로스, 너바나, 나인인치네일스.
자주, 아주 자주 제가 만약 미국에 남아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하곤 해요. 미국에서의 삶이 진정 행복했었거든요.

그래서 키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귀가 더 쫑긋 세워집니다.

이사가고 싶으신 곳에 초고속 인터넷이 아직도 안된다니 놀랍습니다. 미국은 확실히 지역마다 온도차가 큰 느낌이네요. 나중에 키님의 미국 생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전 사실, 얼마전까지도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퇴근후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온전히 보내려고 노력하면서요.

그래서 전 아내가 잠자리에 든 이후에 새벽 시간에 무언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기 위한 시간을 만들려고 했던거 같아요.(본격 올빼미 생활)

단조로웠기 때문에, 취향이라는 것도 없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습니다.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부터

최근엔 어떤 분과 얘기를 하는데, 맨하탄에 있는 탑 레스토랑 이름들을 얘기하시면서 어딜 좋아하냐고 묻는 질문에 "아 모두 안 가본 곳이다."라고 대답을 하니 상대방이 놀라더라고요. 그치만 어쩌겠어요? 전부 다 처음 들어보는 쉐프와 식당 이름인걸요.

애들 키우느라 바빴던거 같아요.

그런데, 삶에 만족도가 나쁘냐? 하면 또 그렇지가 않아요. 취향은 취향일뿐, 아무런 취향이 없이 살아도, 내가 행복한거는 또 다른 문제인거 같아요.

문득 오늘 희진님이 미모방에 써주신 문구가 생각나내요.

"행복이나 사랑은 감정보단 의지에 가깝고 그 행동의 결과로 긍정적인 감정과 경험이 생기기도 한다." 정말 놀라운 깨달음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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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뮤니티 안내자

초고속 인터넷이 넷플 4K를 볼 수 없다 수준은 아니지만, 이사를 가게 된다면 하루 정도 출근을 하고 재택을 할 생각이라, 빠르고 안정적인 인터넷이 중요해서 지금 동네보다 더 조용한 동네를 다시 천천히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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