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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데리버거, 수영장


사이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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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강습을 마치고 소독약 냄새를 풀풀 풍기며 수영장 입구 쪽으로 내달으면 종종 할아버지가 서 계셨죠.

정통 정장은 아니지만 비스므레한, 하지만 마 같이 얇은 재질의, 약간 탁한 하늘색이었던 재킷에 하늘하늘한 회색 바지를 입으셨던 할아버지. 그리고 분신처럼 쓰고 다니셨던 멋쟁이 중절모. 멀리서 봐도 우리 할아버지인걸 한눈에 알아차릴수 있었어요.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곳은 수영장 맞은편 롯데리아. 부모님은 햄버거를 사주지 않으셨기에 수영장 앞에 할아버지가 서 계신 날이면 너무 기뻐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죠. 할아버지도 아버지께 용돈을 받아 생활하시는 터라 세트 메뉴는 사주시기 힘드셨을거에요. 그래도 900원짜리 데리버거 하나면 그날은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되었어요. 가끔 김빠진 500원짜리 콜라까지 시켜주시면 금상첨화였지요. 롯데리아의 콜라는 유난히도 탄산이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수영 후의 나른함에 햄버거의 달콤함이 겹치면 아주 녹아내릴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는 손주 더울까봐 옆에서 열심히 펄럭펄럭 부채를 부쳐주셨죠.

그렇게 소독약 냄새와 햄버거 냄새를 묻히고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어요. 그 때는 백화점 셔틀버스가 있어서 아주 편했어요. 롯데 백화점, 그랜드 백화점, 현대 백화점 셔틀버스들이 한 시간에 두 번씩 일렬로 동네에 들어서던 모습이 기억나요. 돈 한푼 안들이고 이곳 저곳을 갈 수 있어 참 편했죠. 셔틀버스 운행이 중단 되었을때 얼마나 허전했는지 몰라요.

할아버지는 손주 만나러 오시기 전엔 근처 석촌호수 경로당에서 시간을 보내셨어요. 늘그막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사시면서 유일하게 마음을 둔 곳이 거기였으리라 생각되요. 경로당만 다녀오시면 꽤 행복한 표정이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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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롯데리아에 가서 와이프꺼, 제꺼 햄버거를 샀어요. 저는 역시 데리버거 세트를 골랐죠. 패티는 종이처럼 얇고 고기맛보다 달달한 데리야키 소스맛이 가득한, 어쩌면 유사 햄버거에 가까운 것이지만 뭐 어때요. 전 좋은 걸요. 여전히 먹으면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행복해지는걸요.

셔틀버스를 타고 수영장을 다니던 것도 30여년이 지났고 할아버지가 경로당 친구분들을 만나러 하늘나라에 가신지 15년이 되었지만 데리버거의 맛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30년전만큼 할아버지와 롯데리아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제 아들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증손주를 보시면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으실 것 같아요.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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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Recommended Comments

  • Administrators

글 잘 읽었습니다.

음식, 향기, 계절, 장소, 음악 등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한 추억이 있을 때 불현듯 화들짝 생각이 나곤하는거 같아요.

전 마른 날 갑자기 비가 내려서 비 비린내가 나고, 빗물이 졸졸졸 급하게 흘러가는걸 보면, 어렸을 때 비 맞으며 함께 놀았던 친구들 생각이 나더라고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 소환 좋내요. 그래도 참 좋은 기억과 추억이내요.

+

전 롯데리아 불고기 버거 좋아했는데, 아직도 여전히 있나요? 불고기 버거가 데리 버거로 바뀐걸까요? 다음 한국행엔 꼭 롯데리아 가봐야겠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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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P Members

@Key

강렬한 추억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그때 느꼈던 오감도 통채로 각인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그런 추억이 많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사랑하는 가족의 큰 관심과 사랑속에서 자란 덕이었겠지요.

롯데리아가 처음 생겼을때 시그니쳐 햄버거가 데리버거였다고 합니다. 데리야키 소스 + 햄버거라는 유니크한 조합이어서요.
그 말은 즉슨 불고기 버거와 데리버거는 완전히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걱정마시고 한국에 오시면 불고기 버거 드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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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ministrators

오 그렇군요! 롯데리아 불고기 버거 먹고 싶내요. >.< 한국 가면 앉은 자리에서 3개는 먹을 듯 싶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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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만큼 할아버지와 롯데리아에 가고 싶어요.” 

이 문장을 읽고 가슴에 찡한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할아버지나 할머니와의 그런 추억이 없는데도 말이죠.

제 마음속에도 그런 마음이 있나봐요. 대상이 누구일까요?ㅎㅎ

(오늘 저녁 메뉴는 데리버거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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