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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살, 어떤 하루를 기억하며


사이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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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크게 안좋은 날이 아니면 대부분 일찍 일어났습니다. 새벽의 공기를 마시면 에너지가 들어오는 기분이었거든요. 베란다 창문을 살짝 연 틈으로 새벽 공기를 느끼고 직장에 가는 아내의 밥을 챙겨줍니다. 비록 어제 저녁에 먹었던 된장찌개라도, 몸에는 안좋지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스팸이라도 구워서 식탁에 올렸지요. 맛있게 먹어주는 아내의 얼굴을 잠깐 보고 배웅하면 이제 우두커니 혼자입니다.


설거지를 하고 티비를 켜면 아침 마당이 한창. 평생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방송이었는데 청소기를 들고 이 방, 저 방을 다녀도 내용이 귀에 쏙쏙 잘 들어옵니다. 청소기 작업이 끝나면 지난 번 생일 선물로 받은 물걸레 청소기로 원목 바닥을 천천히 밀고 나가면 청소가 끝납니다. 반짝반짝 새로 태어난 듯한 원목 바닥을 보면 마음도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청소가 끝나면 약정 끝난 핸드폰 마냥 체력이 다 떨어져 소파에 누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통증이 없는 날이라 감사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몇 시간 누워있어야 하는 것은 꽤나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붙이고 얼마나 지났을까. 반쯤 열어놓은 창 밖으로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파란 트럭에서 들려오는 채소 아저씨의 목소리. 편의점 앞에서 들리는 직장인 아저씨들의 희미한 대화 소리. 11층인데도 솔솔 바람을 타고 소리가 귀로 기어들어옵니다. 그렇게 점심 때가 된 것이지요.


겨우 몸을 일으켜 먹을 것을 찾습니다. 보통은 남은 반찬에 남은 밥을 꾸역꾸역 먹곤 하는데 그렇게 하기엔 참을 수 없이 우울한 날이 찾아왔습니다. 조금 우울하면 편의점에서 4000원 짜리 도시락을 사서 올라오는데 오늘은 편의점 도시락 따위로 해결될 날은 아닙니다. 그러면 슬리퍼를 끌며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곤 집 근처 3000원짜리 짜장면을 파는 식당으로 가서 짜장 곱배기를 뱃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몇 분만에 후루룩 점심을 보내버리고 와이프가 준 만 원짜리로 계산을 한 다음 설렁 설렁 걷기 운동을 시작합니다.


집 근처엔 큰 공원이 있어 걷기 참 좋았습니다. 평일 낮 공원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전에는 몰랐지요. 처음엔 생경한 풍경에 놀랐다가 곧 자연스럽게 그 풍경의 일부로 녹아 들어갔습니다. 하릴 없이 걷다보면 계절이 보입니다. 겨우내 메말랐던 벚꽃 나무에는 봉우리가 조금씩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공원 옆 모교 옆을 지나며 안아프고, 건강하고, 쓸데없이 즐거웠던, 친구들과 복작복작했던 10대를 추억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거리엔 저를 빼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지만요.


걷다보면 약 기운 때문인지 어지럽습니다. 통증을 잡아주는 약이라는데 약을 먹으면 하루종일 영혼이 반쯤 나와있는 기분입니다. 눈의 총명함과 정신의 맑음을 80% 이상 빼앗긴 느낌이지요. 고통을 없애는 댓가가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활력이라니 많이 서글펐습니다. 게다가 몸이 정말 안 좋을 때 먹는 약은 글씨를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디버프를 주어 좋아하는 책조차 읽을 수가 없었죠.


집에 돌아오면 방전된 몸을 다시 눕힙니다. 그리곤 4시 반 정도에 일어나 소파에 누워 와타나베의 건물 탐방을 봅니다. 의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반할아버지가 일본의 예쁜 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한 때는 이 프로그램을 보는게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방송을 보고 요리 채널로 돌리면 오늘 뭐 먹을까가 나옵니다. 차돌 된장찌개. 재료를 잘 숙지해서 마트로 달려갑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 지하철 역 안으로 쏙 들어갑니다.


개찰구 쪽에서 오랜만에 칼퇴한 와이프가 나옵니다. 한 손엔 장바구니, 한 손엔 와이프의 손을 잡고 재잘재잘 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둘의 등 뒤로 해가 뉘엇뉘엇 넘어갑니다.


10년간의 30대 중에 8년을 병과 싸우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30대의 대표적인 하루를 꼽아보면 신혼집에서 백수로 지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지독한 통증 속에서 언제 다시 어른으로서 1인분을 할 수 있을지가 가장 심각한 고민이었던 그 때. 지금 돌아보면 꽤나 평화롭게 느껴지는건 제 인생이 결국 -1인분에서 1인분에 가까워진 까닭이겠지요.


하지만 그 때는 하루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앞도. 단 하루 앞도.

 

21.1.21.
 

어제부터 또 몸이 아프군요. 오늘도 병가를 써야하나 고민입니다. 몸이 먼저라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다가 입원이라도 하면 일주일은 쉬어야 하거든요. 올해 목표가 입원 안하고 건강하게 지내기입니다.
34살때와 다르게 이제는 앞이 보입니다. 주간 계획을 짜고 연간 목표도 짜고 보람있게 움직일 수 있지요.
그저 제 가족, 부모님, 주위의 사람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플때는 괴롭지만 그 아픔이 사사롭고 소소한 모래알 같은 일상을 반짝반짝거리게 만듭니다.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Edited by 사이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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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omments


Recommended Comments

  • Administrators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한국 가면 제주에서 만나 한라산 소주 나눠 마시는 그런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고통에도 우리는 하루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잖아요. 그리고는 소홀했던 건강을 되돌아 보는거 같아요.

글을 읽으면서, 소소한 일상이 주는 반짝거림과 행복에 감사하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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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minutes ago, Key said: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한국 가면 제주에서 만나 한라산 소주 나눠 마시는 그런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고통에도 우리는 하루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잖아요. 그리고는 소홀했던 건강을 되돌아 보는거 같아요.

글을 읽으면서, 소소한 일상이 주는 반짝거림과 행복에 감사하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는 어떤 병인지도 몰랐고 치료 방법도 찾지 못해 무척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병인줄 알고, 아플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기 때문에(= under control) 괜찮습니다.

특히 이 병을 받아들이고, 저의 앞에 그어진 한계를 수용한 이후로는 마음이 편합니다.
키님은 아픈일 없이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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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ministrators

@사이시옷님의 글을 읽다보면 보통의 평범한 감수성 이상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생산성도 갖춘 분이니, 30대 때 이야기를 잘 정리해서 글로 엮어보시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밸런스를 잘 찾아 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하신다면, 무한 응원합니다!

+

제가 요근래 급격하게 느끼는게 있는데, 행동, 실천, 연결 이런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나이가 들수록 강력한 자산이 되는거 같고요.

무언가 펼쳐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어떻게 누구와 연결할지 내가 가진 점들이 많을수록 더 많은 연결로 확장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무언가 비슷하지 않나요? 옵시디언에서 우리가 메모들을 작성하고 연결하는 과정도 (문득!) 이와 비슷하구나라는걸 요몇일 사이에 깨닫고 있습니다. 아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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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뭐라 남기기 조심스러운 글이네요. 

무거운 어깨, 두려움과 답답합, 떨림과 용기,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감정이 글을 읽을 때 스쳐지나 갔습니다.

본가 오면 동네에서 소주잔 기울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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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ministrators
6 hours ago, Andrew said:

저에게는 뭐라 남기기 조심스러운 글이네요. 

무거운 어깨, 두려움과 답답합, 떨림과 용기,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감정이 글을 읽을 때 스쳐지나 갔습니다.

본가 오면 동네에서 소주잔 기울입시다.

나중에 저도 조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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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P Members
14 hours ago, Key said:

@사이시옷님의 글을 읽다보면 보통의 평범한 감수성 이상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생산성도 갖춘 분이니, 30대 때 이야기를 잘 정리해서 글로 엮어보시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밸런스를 잘 찾아 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하신다면, 무한 응원합니다!

+

제가 요근래 급격하게 느끼는게 있는데, 행동, 실천, 연결 이런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나이가 들수록 강력한 자산이 되는거 같고요.

무언가 펼쳐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어떻게 누구와 연결할지 내가 가진 점들이 많을수록 더 많은 연결로 확장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무언가 비슷하지 않나요? 옵시디언에서 우리가 메모들을 작성하고 연결하는 과정도 (문득!) 이와 비슷하구나라는걸 요몇일 사이에 깨닫고 있습니다. 아핫!

사실 제 인생을 하나씩 더듬어 정리한 아웃라인이 있긴 합니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누가 봐줄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수필의 대가 피천득님이듯이
제 일상을 주제로 한 글은 꾸준히 펼쳐볼 생각입니다.

늘 응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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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hours ago, 사이시옷 said:

사실 제 인생을 하나씩 더듬어 정리한 아웃라인이 있긴 합니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누가 봐줄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수필의 대가 피천득님이듯이
제 일상을 주제로 한 글은 꾸준히 펼쳐볼 생각입니다.

늘 응원 감사합니다!

글 쓰시는 과정에서 분명 당시의 아픔도 일부 치유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프다는게 사실 몸만 아픈게 아니잖아요. 

일상의 글 응원합니다.

관통하는 주제를 잡고, 책을 목표로 한번 써보셨으면 합니다.

제 생각에 이미 글 쓰시는 재능은 너무나 충분하신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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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ministrators

늘 사랑을 담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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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ministrators

참고로 저는 탐험가입니다 이힛 : ) 지금 제일 고랩 >.< 

근데 레벨업 난이도 조절을 해야할거 같아요. 다음 레벨업 구간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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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뭐라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전하고 싶으나, 썼다 지웠다만 하고 있네요.

왜 그런가 싶어 가만히 보니 제 과거의 모습과 기억이 보이긴 합니다. 

터키와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이, 안타까운 맘과 아무것도 도울 길이 없는 무력감이 원인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썼다, 지웠다 끝에 이렇게 말씀을 드려 봅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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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ministrators

내 작은 고통과 아픔도 타인이 그대로 느낄수는 없기에, 그저 저는 공감과 위로의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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