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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태그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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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개념 필자는 사람을 보고 판단함에 있어, 그릇의 크기를 매우 중요시한다. 윤리가 중요한 현대사회에 자아형성에 관한 그릇의 크기는 윤리관과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자를 대면하면서 자아 개념을 임의로 형성한다. 임의성이란 말은 개인에 따라 자아개념이 다양해진다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표정에 대한 이해로부터 타자와 자신의 의지가 서로 같지 않음을 인지하게 되면서 나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생성시키고, 관계에 의존성에 의해 자아 관념을 확장한다. 자아관념의 확장에는 큰 두개의 장벽이 존재한다. 개인에서 공동체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장벽, 공동체를 확장하여 통합하는 과정에서의 장벽. 자아개념은 임의적으로 형성되기에 매우 다양하지만, 윤리를 기준으로 성숙과 비성숙의 축이 생성된다. 이 글은 성숙한 자아에 대한 글이다. 보편적 자아 자아가 임의로 형성된다고 하지만 보편성은 있다. 관계 의존성이 최소화된 고립된 개인의 경우에도, 예를 들어 부모의 사랑이나 친구 연인과의 유대 관계를 온전히 형성하지 못한채 자아 개념이 형성된 경우에도 신체로부터 반응적으로 얻어진 기쁨과 슬픔을 관장하는 신체적 자아는 여전히 존재하고, 신체에 뿌리를 둔 자기 상태의 극적인 변화를 타자에게서 발견하고 공감하거나 타자로부터 확인 받고 싶어하는 인정 욕구는 언제든지 사회적 자아로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는 공동체로서 공공의 이익을 가치의 토대로 두고 있다. 이 공익 개념과 자아관이 교차하며 성숙이란 새로운 축이 가능하다. 즉 자아 개념은 인간관계를 만나 끊임없이 확장되어가는 성숙의 과정의 한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첫번째 성숙, 자아개념의 발생과 공동체의 만남 자아개념의 발생에 있어 감각의 해석지향성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이 하나 있는데, 단세포 동물에서 지성체에 이르기 까지, 개체가 입력받은 감각정보로부터 생존에 유리하게 만드는 상태값(마음) 을 만들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해석의 경향성이 자아개념을 출현시킨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단세포 동물에게 자극을 주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것과 달리 지성체는 입력된 자극이 생존에 유리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위해 입력정보의 상태를 만들고, 이 상태를 해석 가공하여 행동을 선택하게 하는 고도의 정보처리 기관으로서 자아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미시동물의 세계는 너무나 분명하게도 세계가 먹이, 상위포식자, 무관여자, 혹은 생식의 대상과, 새끼로 구분된다. 여기서 중요한건 먹이활동과 가족관계다. 모든 존재는 태생적으로 한쪽으로는 폭력을 행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사랑을 실현한다. 이것은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인간 또한 이 법칙에서 도주가 불가능한 생명으로 반드시 한쪽으로 파괴와 해체 지배와 포식을 일삼으며, 다른 한쪽으로 윤리적 세계와 온전한 애정, 헌신적 사랑으로 가득찬 유토피아를 꿈꾼다. 사람은 타자의 행동이라는 득실이 불분명한 정보로부터, 타자의 상태를 추측하고 피아식별을 통해 구분하며 아군 혹은 적군이라는 상태 판단 아래 행동반응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 피아식별에는 개개인마다 내재된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는데, 부모와 친구, 대인관계와 문화에서 얻은 정보로부터 사회적 자아를 형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피아식별개념은 공동체적 자아관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사회적 자아는 언제나 아군의 바운더리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아군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는 사람에 대해서 헌신하고 온전한 애정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게 독립된 개인의 자아에서 공동체적 자아로 변화하는 첫 번째 성숙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앞의 문장에서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이분법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영민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피아식별 그 사이에 있는 무수한 비결정적 가능성들, 타자들이 늘 존재한다. 사실상 다양한 공동체들이 중첩되어 모인 사회는 이 비결정적 타자들이 가득하다. 이 비결정적 타자들에는 식민의 대상, 자원, 아군이 될 수있는 존재들이 있으며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개인과 개인 사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자원, 혹은 적군이 아니기 위해서는 일종의 제스쳐나 협약이 필요한데, 폭력적인 관계가 아님을 보여줄 수단이 필요하다. 인사의 제스쳐가 공격의사가 없음의 표시, 무기 없음을 표시하기 위해 빈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는건 너무나 유명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인사는 치명적인 약점이 머리를 노출하며 스스로의 시선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폭력성을 회피한다(이와 반대로 폭력구조를 강제하는 제스쳐로 '눈깔아'를 시전하는 건달-일진-양아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우리는 감사를 표하거나 상대의 판단지점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상대의 인정욕구를 충족시켜주거나, 일종의 잉여가치의 나눔-선물을 통해 우호관계를 표시하는 등 폭력관계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우호관계를 선언한다. 과거 귀족들이나 왕족들이 정략결혼을 통해 딸을 시집보내는것도 그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현대에는 차나 식사를 대접하거나, 선물을 제공하는것으로 공동체를 가볍게 선언하는 모습은 매우 일반적이다. 반면 공통 의사결정영역에 있어 주도권의 강탈 혹은 유머를 표방한 상대 평가는 암묵적으로 관계의 상하를 형성하기도 한다. 상하관계는 지배-피지배 프레임으로 고착화되기 쉽기 때문에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자기개방을 통한 약점노출과 같은 상하의 역전을 가능하게 하는 제스쳐가 필요하다. 만약 주도성이 강한사람이 이런 역전의 제스쳐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암묵적으로 상대를 식민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태도를 갖고있다 볼 수 있다. 그래서 건강한 유머는 유머가 만들어내는 비방성, 수직구조의 방향성을 언제나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서 벡터를 상쇄시켜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다. 때문에 유머는 종종 폭력적 혹은 구조권력적으로 보여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벡터의 배치로 상쇄를 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해낸다. 오히려 기존의 권력구도의 풍자를 통해 구조를 해체하여 벨런스를 맞추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자기 자신을 낮추는 허당미, 백치미, 흔한 남성들이 과한 표현으로 사용하는 병신미 같은 약점노출은 폭력관계를 벗어나는데 효과적인 셈이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의도적으로 바보짓을 하는 남성은 피-아 사이의 비결정적 상태를 깨뜨리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흔히 인기인이 된다. 수직관계의 해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고급 스킬이 있다면, 상대의 평가와 완전히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공유된 판타지를 들 수 있다. 이는 매우 고상하고 우아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인데, 공동의 목표(판타지)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정서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 학습하여 성장하는 과정을 서로 공감각적으로 공유하는것이다. 이건 구글의 OKR이나 사이먼시넥 골든서클의 핵 why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이는 문화의 중추가 되어 언제나 작동하는 구심점이 된다. 두번째 성숙의 가능성, 공동체 너머 자아개념의 성숙에 첫번째 과정은 자아개념에 타자를 포함시키는 과정, 공동체를 의식하고 자아개념에 포함시키는 과정을 말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공동체 관념은 내부적으로 이미 하나의 관계적 이상점을 형성하고 있으며, 개인이 공동체의 바운더리 내부에서 선을 행한다는게 늘 올바르다는 오만한 공감에 빠지기 쉽다. 미시동물의 사태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면, 생명은 필연적으로 한쪽으로 파괴를 다른 한쪽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어떠한 벡터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사랑의 지향점의 반대에는 반드시 폭력성이 잠재되어있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선이었던 행위가 외부에서 폭력으로 비춰지는 사태는 매우 흔하다. 사냥은 늘 집단의 지속가능성에 기여하는 선임과 동시에 사냥 대상에게 극한의 폭력을 선사한다. 사회는 이런 집단을 기준으로, 극한의 폭력을 회피하는 대신 제국주의적 식민화를 기반으로 착취의 형태로 폭력이 구성된다. 비즈니스 세계가 야생성을 띄는것은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며 도태시키고, 한편으로 운명공동체를 선언하며 윈윈전략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런 다양한 목적성을 가진 여러겹으로 중첩된 공동체의 집합으로 구성되어있다. 공동체들간의 야생성, 이기적 보편성을 넘어서서 한차례 윤리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공동체를 확장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셈이다. 우리가 이기적 개인에서 친구와 연인을 만나 하나의 공동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숙해지는 과정과 같이 말이다. 이는 매우 이상적이라 여겨질 수 있으나, 이 과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언제나 오만한 올바름에 빠지게 된다. 필자는 확장 가능한 공동체의 바운더리를 그릇이라고 보고있다. 누군가는 이런 사태를 마주하면서 세계는 여전히 판단 불가능한 비결정적 다양성, 무질서로 가득차 있다고 인지할 수 있다. 무질서한 야만의 상태가 자연이 그러한것처럼 최상의 상태라고 주장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적 지향점으로 공동체를 확장해보자. 확장된 공동체, 통합된 공동체를 묶어내거나 그것 너머의 유일한 지점은 여전히 공유된 윤리적 지향점, 판타지, 이상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비결정적 사태의 맨얼굴, 세계의 무질서, 세계의 실재와 마주했을 때, 오히려 기쁨과 환희를 마주해야만 한다. 이곳은 그 누구도 발을 내딪지 못한 미지의 영역, 역사의 최전방, '지금 이순간'이기 때문이다. 내일 뭐할지 아무것도 결정되있지 않은 하루를 앞두고, 침대에 누워 내일을 그려나갈때, 우리 삶의 의미의 방향성이 한차원 생성되는 것처럼. 그려지지 않은 미래를 마주한 것과 같지 않은가. 공동체의 확장이라는 거시적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미시적인 개인의 세계로 들어가야만한다. 관측 불가능한 지점들은 세계의 구성원리, 프랙탈에 의해 예측될 수 있으며, 동형적 사고를 통해 가능성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